언론속의 국민
‘노빠’ 와 ‘황빠’ / 김환석 (사회학과) 교수
- 06.01.04 / 장상수
[한겨레 2006-01-03 21:09]
우선 개인적인 고백으로부터 글을 시작해야겠다. 나는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를 찍었다. 지금 흔히 일컬어지는 ‘노빠’ 정도의 지지자는 아니었지만, 마침 투표일 당일이 연구년을 위해 외국으로 떠나는 날이었음에도 아침 일찍 투표장에 가족과 함께 나가 노 후보에게 표를 던지고 갈 정도의 열성은 있었다. 사실 노 후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를 지지했던 이유는, 그가 우리 정치를 수십년 동안 지배해온 독재세력에게 맞서는 민주세력의 정당한 후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가까운 지인들은 왜 민주노동당 후보를 찍지 않느냐고 나를 면박하였지만, 당선 가능성의 관점에서 볼 때 노 후보를 지지하는 것이 민주세력의 승리를 돕는 길이라는 현실적 판단을 하였던 것이다.
노무현 정부 3년이 지난 지금 그때 나의 기대는 불행하게도 완전한 환멸로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망스러운 사건이 많았지만,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건 바로 이 정권과 황우석 교수 사이의 부당한 유착이었다. 이미 노무현 정부가 출범할 당시 과학기술부 장관 후보로 황 교수가 유력하게 떠올랐던 적이 있다. 이후 논란이 많던 생명윤리법의 제정 과정에서 황 교수의 입김이 강력하게 작용하여 배아복제 연구와 관련한 조항은 누더기가 되다시피 했으며, 그나마 ‘경과 조처’를 두어 법의 발효 시점을 1년이나 늦추는 등 황 교수 봐주기가 공공연히 저질러졌다. 2004년 초부터는 청와대 내에 이른바 ‘황금박쥐’ 체제가 갖추어져 황 교수팀에 대한 초법적 집중지원과 ‘황우석 영웅 만들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같은 해 4월 총선에서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서로 경쟁적으로 황 교수를 비례대표로 영입하려는 계획이 추진되기도 했다.
노무현 정권에서 ‘황빠’ 세력의 핵심이 서울대 72학번이었다는 것은 비교적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이해찬 국무총리와 정동영 전 장관은 때마다 황 교수에 대해 전적인 신뢰를 표시해 왔으며, 서울대 72학번 민주화운동 인사들의 모임인 ‘마당’에 황 교수를 특별회원으로 초빙할 정도로 이들 사이의 인간관계는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도 민주화운동 세력의 하나란 명분이 있었던 ‘노빠’의 일부가 황 교수에 대한 맹목적 지지세력인 ‘황빠’로 변질된 것은 우리나라 정치사의 비극적 사건이라고 생각된다. 황우석 모델의 과학이야말로 성장주의와 애국주의, 결과지상주의 및 윤리 불감증 등 바로 ‘노빠’들이 민주화의 적으로 삼고 줄기차게 싸워왔던 박정희 패러다임을 과학에서 구현한 화신이기 때문이다.
‘노빠’와 ‘황빠’의 결합을 당연한 것으로 알던 사람들은, 일부에서 ‘노빠’ 언론이라고 부르던 <문화방송>과 <한겨레>, <오마이뉴스> 등이 왜 이번 사건에서 황 교수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는가를 의아하게 생각하며 각종 음모론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답은 의외로 단순한 데 있다. 편협한 국익 등 정치적 목적에 의해 진실이 가려져서는 안되기 때문이며, 이 언론기관들은 그 단순한 원칙을 실천했을 뿐이다. 따지고 보면 민주주의가 중요한 것도 그것이 진실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며, 진실 위에서만 진정한 민주주의는 꽃을 피운다. 그동안 황 교수를 지지했던 민주세력들은 이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과학기술에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영웅 숭배는 과학에도, 민주주의에도 해롭다. 투명하고 민주적인 과학 연구와 검증시스템만이 과학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이라는 점이 이번 사태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이다.
김환석/국민대 교수·과학사회학
‘노빠’ 와 ‘황빠’ / 김환석 (사회학과) 교수 | |||
---|---|---|---|
[한겨레 2006-01-03 21:09] 우선 개인적인 고백으로부터 글을 시작해야겠다. 나는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를 찍었다. 지금 흔히 일컬어지는 ‘노빠’ 정도의 지지자는 아니었지만, 마침 투표일 당일이 연구년을 위해 외국으로 떠나는 날이었음에도 아침 일찍 투표장에 가족과 함께 나가 노 후보에게 표를 던지고 갈 정도의 열성은 있었다. 사실 노 후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를 지지했던 이유는, 그가 우리 정치를 수십년 동안 지배해온 독재세력에게 맞서는 민주세력의 정당한 후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가까운 지인들은 왜 민주노동당 후보를 찍지 않느냐고 나를 면박하였지만, 당선 가능성의 관점에서 볼 때 노 후보를 지지하는 것이 민주세력의 승리를 돕는 길이라는 현실적 판단을 하였던 것이다. 노무현 정부 3년이 지난 지금 그때 나의 기대는 불행하게도 완전한 환멸로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망스러운 사건이 많았지만,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건 바로 이 정권과 황우석 교수 사이의 부당한 유착이었다. 이미 노무현 정부가 출범할 당시 과학기술부 장관 후보로 황 교수가 유력하게 떠올랐던 적이 있다. 이후 논란이 많던 생명윤리법의 제정 과정에서 황 교수의 입김이 강력하게 작용하여 배아복제 연구와 관련한 조항은 누더기가 되다시피 했으며, 그나마 ‘경과 조처’를 두어 법의 발효 시점을 1년이나 늦추는 등 황 교수 봐주기가 공공연히 저질러졌다. 2004년 초부터는 청와대 내에 이른바 ‘황금박쥐’ 체제가 갖추어져 황 교수팀에 대한 초법적 집중지원과 ‘황우석 영웅 만들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같은 해 4월 총선에서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서로 경쟁적으로 황 교수를 비례대표로 영입하려는 계획이 추진되기도 했다. 노무현 정권에서 ‘황빠’ 세력의 핵심이 서울대 72학번이었다는 것은 비교적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이해찬 국무총리와 정동영 전 장관은 때마다 황 교수에 대해 전적인 신뢰를 표시해 왔으며, 서울대 72학번 민주화운동 인사들의 모임인 ‘마당’에 황 교수를 특별회원으로 초빙할 정도로 이들 사이의 인간관계는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도 민주화운동 세력의 하나란 명분이 있었던 ‘노빠’의 일부가 황 교수에 대한 맹목적 지지세력인 ‘황빠’로 변질된 것은 우리나라 정치사의 비극적 사건이라고 생각된다. 황우석 모델의 과학이야말로 성장주의와 애국주의, 결과지상주의 및 윤리 불감증 등 바로 ‘노빠’들이 민주화의 적으로 삼고 줄기차게 싸워왔던 박정희 패러다임을 과학에서 구현한 화신이기 때문이다. ‘노빠’와 ‘황빠’의 결합을 당연한 것으로 알던 사람들은, 일부에서 ‘노빠’ 언론이라고 부르던 <문화방송>과 <한겨레>, <오마이뉴스> 등이 왜 이번 사건에서 황 교수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는가를 의아하게 생각하며 각종 음모론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답은 의외로 단순한 데 있다. 편협한 국익 등 정치적 목적에 의해 진실이 가려져서는 안되기 때문이며, 이 언론기관들은 그 단순한 원칙을 실천했을 뿐이다. 따지고 보면 민주주의가 중요한 것도 그것이 진실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며, 진실 위에서만 진정한 민주주의는 꽃을 피운다. 그동안 황 교수를 지지했던 민주세력들은 이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과학기술에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영웅 숭배는 과학에도, 민주주의에도 해롭다. 투명하고 민주적인 과학 연구와 검증시스템만이 과학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이라는 점이 이번 사태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이다. 김환석/국민대 교수·과학사회학 |